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두 칸 (문단 편집) == 여담 == 카이두에게는 24명의 자식들이 있었으며, 그중 9명의 딸이 있었다. 딸들 중 쿠툴룬(Khutulun)이라는 딸은 기록이나 문헌으로 많이 남아 있다. 그녀를 모티프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이다. 그녀의 결혼에 대해서 [[마르코 폴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힘이 세고 용맹하여 아버지 카이두의 칸국에서 힘으로 그녀를 능가할 수 있는 남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카이두는 그녀가 결혼하기를 간절하게 바랬지만, 그녀는 자신을 무력과 용맹, 지구력, 군사적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는 말 100마리를 걸고 자신과 싸워 이기는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공개구혼'에 100명의 청년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쿠툴룬이 청년들이 가져온 10,000필의 말을 소유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1280년경 잘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며 무예가 뛰어난 한 청년 왕자가 카이두의 궁정으로 와서 쿠툴룬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무려 1,000필이나 되는 말들을 걸고 그녀와 레슬링 시합을 겨루고자 했다. 카이두는 부유하고 당당한 청년에게 마음이 끌려, 쿠툴룬에게 일부러 져주라고 은밀하게 부탁했다. 쿠툴룬은 도도하게 답했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그 사람이 저를 이긴다면 기꺼이 그의 아내가 될 거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쿠툴룬과 청년 왕자의 레슬링 시합이 벌어졌다. 전에 상대했던 젊은이들과 다르게 청년 왕자는 오래 버텼다. 하지만 쿠툴룬의 빠른 공격기술에 자신만만하던 젊은 왕자도 무릎을 꿇었다.결국 왕자는 말 1,000필을 남긴 채 카이두의 궁정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녀를 시집보내고자 했지만 실패하자 카이두는 체념하고 딸과 함께 전장터를 누볐다. 하지만 쿠툴룬을 오랫동안 시집보내지 않는 카이두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을 의심하고, 부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카이두 같은 경우, 유목적 관습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딸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정주민들보다 자유로운 시각을 보인 듯 하지만, 그가 지배한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지대는 정주 도시문명이었고, 오래도록 [[이슬람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보다 보수적인 여성관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카이두는 사람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딸을 아브타글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집사》는 그녀가 남편을 선택하여 결혼했다고 증언하지만, 한때 전장을 호령한 쿠툴룬에게는 '울며 겨자먹기 식'의 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 의하면, 이후 쿠툴룬은 타르사켄트와 카르발릭이라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이 한때 일세를 풍미했던 한 몽골 '여전사'의 생애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